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훌라구 칸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[[칭기즈 칸]]의 막내아들인 [[툴루이]]와 그의 아내인 소르각타니 베키[* ?~1252. 케레이트 부족의 지도자 [[옹 칸]]의 동생 자하감보의 딸.]의 아들이며 형제는 [[몽케 칸]]과 [[쿠빌라이 칸]], [[아리크부카]]가 있다. 훌레구는 독실한 [[불교]] 신자였으나 [[네스토리우스교]] 신자였던 어머니 소르각타니 베키와 아내인 도구즈 카툰의 영향을 받아 [[기독교]]에 제법 호의적인 태도를 취했고, 기독교에 대한 일 칸국 통치자들의 우호적인 태도는 일 칸국이 [[이슬람교]]로 개종할 때까지 이어졌다. 이후 3대 대칸이었던 [[구유크 칸]] 사후 발발한 왕위 계승 분쟁에서 최종 승리자가 된 친형 몽케에 의해[* 바투를 몽골 초원으로 소환했던 귀위크 칸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대칸 자리에 공백이 발생했는데, 이 때 바투의 지원을 받아 몽케가 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.] 서아시아 원정군의 총사령관을 맡게 된 훌레구는 서아시아로 나아가 1256년에 [[어쌔신|하사신]]의 근거지인 알라무트를 쓸어버리고 마침내 1258년 2월 [[아바스 왕조]]의 수도인 바그다드로 진격해 들어갔다. 바그다드를 포위한 훌라구는 칼리파 [[알 무스타심]] (1213~1258)에게 "항복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"며 무조건적인 항복을 강요하였으나, 알 무스타심은 '''"[[마그레브]]와 이라크까지 모든 무슬림들이 [[허세|도우러 올 것이다]]"'''라고 코웃음치며 [[사망 플래그|단호히 항복을 거부하였다.]] 결국 바그다드 역시 몽골군의 공격으로 무너졌고[* 알 무스타심의 예상과는 달리 도우러 온 이들은 없었고 결국 인근 요새가 함락되자 그제서야 큰일 났다 싶었는지 부랴부랴 항복 교섭을 하려고 했지만 훌라구는 그냥 생깠다.] 수많은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알 무스타심 본인도 양탄자에 말린 채 말발굽에 짓밟혀 끔살당하고 말았다(...).[* 당시 몽골 제국에서는 피를 흘리지 않고 죽이는 것을 명예로운 처형 방식으로 여겼다.][* 이후 압바스 제국의 잔당은 [[맘루크 왕조]] [[이집트]]로 망명하여 16세기까지 칼리프 지위를 유지하였다.] 당시 세계 인류 지식의 중심점이었던 바그다드 도서관(House of Wisdom) 역시 몽골군의 공격으로 문자 그대로 초토화되었다. 당시 이곳은, 그리스, 페르시아, 인도, 중국 등에서 모은 수학, 물리학, 천문학, 화학, 의학, 철학 등 세계에서 제일 많은 숫자의 서적들이 보관되어 있었다고 회자될 만큼 아랍 문명의 눈부신 황금기를 상징하는 건물이었다. 바그다드 함락 후 티그리스 강은 물속에 던져진 책들의 잉크와 학살된 과학/철학자들의 피로 물들었다고 전해진다. 이 사건 이후로 중동 문명은 몽골제국에게 완전히 정복 당하면서 끝끝내 전성기를 회복하지 못하였고 쇠퇴 일로를 걸었으며, 이후의 유럽에게 인류 문명 발전의 주도권을 내주게 된다. 바그다드 정복에 성공하며 제대로 기세를 탄 훌라구의 몽골군은 [[시리아]]와 [[팔레스타인]]까지 나아갔고, 이에 [[십자군 국가]]들과의 연계까지 시도했으나[* 하지만 십자군은 몽골군과 연계하여 맘루크 왕조를 공격하는 것에 회의적인 태도를 취했다.] 본국에서 몽케 칸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. 이 소식을 들은 총사령관 훌라구는 차기 대칸 선출을 위한 [[쿠릴타이]]에 참석하려고 부관인 키트부카(?~1260)[* 나이만족 출신 네스토리우스교 신자였다.]에게 선발대의 지휘를 맡긴 뒤 소수 병력만을 거느린 채 혼자 맘루크를 정복하라는 명령을 내리고는 곧장 떠나버렸다.[* 하지만 훌라구는 몽골이나 중국 땅으로 가지 않고 [[아제르바이잔]] 지역에 머물면서 사태의 추이를 관망했다. 이후 쿠빌라이가 칸의 자리를 이어 받게 되자 자연스레 그의 편이 된다.] [[그러나 이 사진이 표지로 사용되는 일은 없었다|그러나]] 키트부카가 이끄는 몽골군은 맘루크를 너무 얕잡아본 나머지 돌격을 감행하며 맘루크군을 마구잡이로 학살했는데 맘루크 왕조도 초반에는 거의 전멸당하면서 멸망의 위기까지 몰렸다. 비록 소수 병력이긴 해도 그 상대는 당대 최강의 군대라 불리던 몽골군이었다. 그러나 맘루크 왕조는 총동원령을 내려 국가의 모든 병력을 있는대로 전부 끌어모았고 심지어 지도자까지 나서서 온 힘을 다해 [[아인 잘루트 전투]]에서 저항한 끝에 결국 키트부카가 이끄는 소수 병력의 맘루크 정복은 좌절되고 만다. 이후 훌라구는 [[킵차크 칸국]]이 [[맘루크 왕조]]와 동맹을 맺고 공격하려 했을 때 [[쿠빌라이 칸]]과 협력 관계를 맺으면서 페르시아,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서아시아 영토에 거대 제국 일 칸국을 세웠다. 그 뒤 1265년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인 [[아바카 칸]]이 일 한국을 이어 받는다. 사후에 그의 유해는 이란 [[우르미아 호]] 근처에 묻혔고 그 곳에 영묘가 지어졌다. 재미있게도 시리아에서 로마(비잔티움) 시대가 끝난 지 한참 된 13세기의 시리아 기독교 측에서 남긴 기록에는 훌라구를 새로운 콘스탄티누스로 묘사했던 기록도 있다고 한다. 훌라구가 [[바그다드]]를 함락시키는 등 이슬람 세계를 크게 약화시켜 시리아 기독교인들이 이슬람권 한복판에서 박해받던 처지를 끝냈기 때문에[* 참고로 일 칸국이 1290년데에 이슬람으로 개종하긴 했다.(...)]([[적의 적은 나의 친구|훌라구는 전혀 그런 의도가 없었겠지만]]), 마치 옛날 로마가 이교(그리스 로마 전통종교)시절일 때 박해받다가 콘스탄티누스가 나타나 종교의 자유를 주어 박해를 끝낸 것에 비유한 것이다.[* 'Transformations of Romanness' 23p, 원문:'as a result, Syriac-speaking Christians were interested in Roman history regardless whether they were living under Roman rule.' In a thirteenth-century Syriac gospel lectionary,the pagan Mongol khan Hülägü could be portrayed as a new Constantine.'] [[http://en.wikipedia.org/wiki/Hulagu_Khan|참고자료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